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기예르모 고로스티사 (문단 편집) ==== 클럽 ==== 고로스티사는 [[스페인]]으로 돌아와 병역을 마쳤는데 페롤에서 선원으로 복무했다. 라싱 페롤에서 있던 고로스티사는 [[라푸엔테]]의 추천으로 [[아틀레틱 클루브]]에 입단했다. 이적 과정에서 원소속팀이 지역 라이벌로 그를 보내고 싶지 않아해서 잡음이 좀 있었지만 빌바오 측에서 2만 [[스페인 페세타|페세타]]와 한 차례의 친선 경기로 갈등을 마무리지었다. 그리고 이적 첫 해, 빌바오는 [[무패 우승]]을 포함한 [[더블#s-7|더블]], 고로스티사는 [[라리가|리그]] 득점왕을 차지해 팀과 개인 모두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.[* 이후 고로스티사는 1931-32 시즌에 피치치 트로피를 한 번 더 탔지만 실제 득점은 팀의 센터 포워드 바타가 더 많은 괴상한 결과도 나왔다. 그래서 피치치 트로피 수상자는 고로스티사, 최다득점자는 바타라는 기묘한 기록으로 남아있다.] 이것을 시작으로 당시 아틀레틱 클루브는 7시즌 동안 리그와 컵에서 8차례 우승을 차지하는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. 하지만 그들의 전성기는 [[스페인 내전]]으로 끝나버렸다. 고로스티사는 처음엔 스페인 공화정의 편을 들었고 다른 바스크 선수들과 함께 유럽 투어를 다녔다. 하지만 고로스티사는 다른 선수들과 다르게 팀을 떠나 스페인으로 돌아갔고 [[스페인국]]의 편으로 전향했다. 이런 그의 행보에 스페인국 측은 그를 선전 도구로 이용했다. 전쟁이 끝난 후 그는 아틀레틱 클루브에서 1년을 더 뛴 후 [[발렌시아 CF]]로 이적했다. 발렌시아에 처음 왔을 때 발렌시아 서포터들은 5만 페세타를 주고 사온 31살짜리 윙어의 능력에 의구심을 표했다. 하지만 발렌시아에서 그는 곧 서포터들의 의심을 응원과 찬사로 바꾸었고 팀은 그가 있을 때 2차례의 리그 우승과 1차례의 [[코파 델 레이]] 우승을 차지했다. 발렌시아의 리그 500번째 득점도 그의 몫이었으며 1946년에 고로스티사가 발렌시아를 떠날 때 팀에서 고별 경기를 치러주기도 했다. 1946년, 37세의 고로스티사는 발렌시아를 떠나 바라칼도, 후벤시아를 거쳐 로그로녜스에서의 [[선수 겸 감독]] 생활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마쳤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